2013년 2월 17일 일요일

티무르 제국



몽골제국의 해체
중국을 지배하였던 대원-울루스의 몽골인 들은 1368년 명나라에 의해 중국에서 쫓겨나 몽골고원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서로 싸웠다.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울루스도 1340년에는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란의 일칸국도 1330년 이후 정국이 혼란에 빠져 몇 개의 지방정권으로 분열되었다. 남 러시아의 킵착칸국도 14세기의 후반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제국연합체가 부스러져 해체된 원인은 황금씨족의 칸위 쟁탈전을 들 수 있다. 칭기스칸 일족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정복지역을 일족의 공유재산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광대한 정복지역에 일족이 분산 파견되었으며 이들의 현지 독립화 경향은 피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유목국가에서 볼 수 있는 실력주의 계승법이 이어져, 제국에 흩어진 황금씨족 중 유력한 자들은 칸이 사망함과 함께 자신들의 계승권을 경쟁적으로 주장하였던 것이다.
칭기스칸의 사후에는 몽골제국을 세운 칸의 권위로 제2대의 오고타이 만은 수월하게 즉위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제3대 구유크, 제4대 몽케, 제5대 쿠빌라이는 일족간의 내란을 거쳐 칸으로 되었다. 이와 같은 싸움으로 제국내부의 통일은 약화되고 무너지기 쉽게 되었다. 여기에다 몽골은 어디까지나 유목민적 전통을 중요하게 여겨 초원생활을 해야한다는 논리와 새로이 획득한 중국, 이란 등 정착사회를 아우르는 새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대립하였다. 결국 이러한 대립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몽골제국은 지역별로 해체되어 갔다.

티무르(1336 ~1405. 2. 19)
티무르 Timur. Timour. 별칭은 Timur Lenk, Timurlenk(터키어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
이슬람 신앙을 지닌 투르크인 정복자. 중국 이름은 첩목아(帖木兒)이다. 주로 인도에서 러시아를 거쳐 지중해까지 정복하는 과정에서 행한 야만적 행위와 그가 세운 왕조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티무르의 시대의 투르크-몽골의 전통은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칸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아미르’(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때때로 그 앞에 ‘부주르그buzurg’ 또는 ‘칼란kalān’, 즉 ‘위대한’을 붙여 ‘위대한 아미르’라 자칭했다.
그가 칭기스 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그의 이름으로 통치한 뒤에는 ‘부마‘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사위’라는 의미인데, 그가 칭기스 가문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인 무굴 제국의 군주들은 이를 근거로 스스로의 왕조를 ‘구르칸Gurkān(‘후르겡’의 이란어형) 왕조’라고 불렀다.
이란의 사서들에서 그는 ‘티무리 랑’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절음발이 티무르라는 의미이다. 그의 적들은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싶을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 유럽에서 그를 부를때 사용하는 태멀레인(Tamerlane)은 ‘티무리 랑’의 변형이다.
14세기 후반 서(西)차가타이 한국(汗國) 출신의 티무르는 스스로를 칭기즈 칸의 자손이라 칭하고 몽골 제국의 재건을 기도했다. 그는 사마르칸트에 수도를 두고 1380년에 카르토 왕조를 멸망시키고, 1393년에는 자라일 왕조의 군주 아마드를 바그다드에서 몰아냈으며 동서 차가타이 한국·일 한국을 병합하였고, 킵차크 한국과 북인도에 침입했다. 이어 소아시아 방면에서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를 앙고라에서 격파해 구(舊)몽골 제국의 서반부를 영유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티무르는 다시 몽골인의 구적(仇敵) 명(明)의 정복을 기도했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티무르의 사후 왕실의 상속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샤 루흐 시대에 일시 번영을 되찾았다. 그런데 울루그 베그가 암살된 뒤 쓰러진 뒤에는 제국의 분열이 표면화되어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에 두 세 개의 정권이 대립했다. 그리고 킵차크 한국에서 나온 북방의 우즈베크족이 침입하여 1500년에는 사마르칸트가 함락되고, 2년 뒤 헤라트도 함락되었다.
16세기에는 티무르 왕조의 왕자 바부르가 페르가나왕이 된 뒤, 인도에 침입하여, 무굴 제국을 수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연대기 작가들은 티무르 왕조가 칭기스 칸과 티무르의 혈통을 이었다는 이유로 칭송했다.

티무르 제국
Timurid Dynasty는 티무르에 의해 14세기 중엽에 세워진 중아시아의 무슬림 왕조,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메소포타미야, 카프카스 산맥등을 통치했다.

1370년 티무르는 먼저 심복의 아미르들을 군대와 여러 관청의 요직에 배치하여 신정권의 조직을 굳히고 사마르칸드에 요새와 성곽 및 궁전의 건축을 명령하여 수도에 어울리는 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불온한 움직임을 나타내는 차가타이 아미르들을 숙청하고 여러 부족군을 해체, 재편하여 심복 아미르들의 지휘하에 집어넣었다. 이러한 내부 정리 후 그때까지 억눌려있던 차가타이인의 왕성한 에너지를 티무르는 외부로 분출시켰다.
티무르는 사마르칸드를 보급기지로 삼아 자신은 오르도를 이끌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정복전을 감행하였다. 티무르는 탁월한 군사 지도자였으며 한번 내린 명령은 결코 취소하는 법이 없는 무서운 지도자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드를 세계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하려 하였다. 이에 그는 장엄하고 화려한 왕궁을 비롯하여 모스크와 마두라싸를 차례차례 건립하고 관개망도 정비하였으며 바자르(시장)도 크게 확장시켰다.
수도 사마르칸드는 유럽, 중동과 중국을 연결하는 동서의 교역간선로와 러시아 및 킵착초원과 인도를 연결하는 남북의 교역로가 교차하게 되어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란, 시리아, 동투르키스탄, 중국 등에서 온 기술자들은 유리 기기, 도자기, 융단, 자수, 제지, 무구등 각종 공예방면에서 기술을 겨루었고 도로, 시장(바자르), 대상숙박소등을 정비하여 사마르칸드는 모든 내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중추가 되었다.
티무르가 즉위한 이후 킵착칸국, 인도, 타타르 등 여러 나라에서 사마르칸드로 가져온 상품은 실로 엄청나서 판매진열장이 동이나 버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티무르는 기술관리에게 명하여 사마르칸드 성을 가로지르는 시장 을 건설하여 그곳에 상인을 초치시키도록 하였다. 시장을 건설하는 비용은 사마르칸드의 전 시민이 부담케 하고 공사는 작업반을 2반으로 나누어 주야로 시행했기 때문에 20여일 남짓한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이 바자르는 사마르칸드성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이르는 대 시장으로 규모는 상당히 크고 천정은 돔으로 덮여 있는데 광선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곳곳에 창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와 그의 부하들은 도시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 주변의 초원이나 정원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사마르칸드 교외의 목초지에 세워진 티무르의 텐트는 한마디로 성이라고 할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것으로 그 주위에는 4만-5만 정도의 부하 들의 텐트가 가지런히 세워졌다. 이들이 한번 원정에 나서면 일제히 텐트를 접고 가족과 가축 모두 전쟁터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도시주변에 살면서도 정착민으로 동화하지 않고 유목민의 생활양식을 유지함으로서 말을 이용한 기동성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목군단을 능숙하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티무르의 성공은 칭기스칸의 그것과 거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정착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많은 건축활동을 한 것에 비하여 칭기스칸에게 정착사회는 보호 육성의 대상이 아니고 약탈의 대상으로 파괴가 목표였다. 초원지대에서 자란 칭기스칸은 정착사회의 성질이나 이용가치를 잘 몰랐던 것이다
수도인 사마르칸트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서 번영하여 왕년의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로 번영했다. 예술·문화면에서는 이란 문화의 영향이 강하고 역대 군주의 보호 및 장려에 의해서 티무르풍(風)의 이슬람 문화가 발달했다. 건축 양식에서는 중국식의 탑과 유목 민족의 천막을 조합한 독특한 사원(寺院)이 만들어졌고, 회화(繪畵)에서는 이란풍의 미니아튀르(세밀화細密畵) 예술이 발달했다. 이란 문학에서는 시인 자미의 이름이 가장 알려졌고 아라비아 수학·천문학·의학· 지리학·역사학 등도 발달하여 이슬람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대외원정
티무르는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누어주어야 하는 유목국가를 수립한 이상 대외원정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티무르는 끊임없이 정복전에 나섰다. 중앙아시아 통일 후 티무르가 고향 땅에 머문 기간은 전부해서 몇 년 밖에 안되었다. 그는 사마르칸드에 대 바자르(공동시장)를 건설하여 통상활동을 활성화시켜 대외원정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였으며 상인을 각지에 파견하여 여러 나라의 지도와 기록을 제공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정세에는 더없이 정통하여 그의 외정은 전광석화와 같이 재빨랐다.
주치가의 푸른오르도에서 톡타미쉬가 망명해 왔을 때 티무르는 톡타미쉬를 도와 울루스칸과 싸워 톡타미쉬를 푸른오르도의 칸으로 세웠다. 톡타미쉬칸은 나아가 본가인 황금오르도에 개입하여 1378년 볼가강변의 아스트라칸과 사라이를 점령하였다. 톡타미쉬칸의 성공과 함께 티무르와의 관계는 차갑게 되었다. 1385년 톡타미쉬칸은 타브리스를 습격하여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티무르는 1380년에 먼저 이란 고원으로 진군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잘라이르 왕가를 격파하고 술타냐와 타브리스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티무르는 먼저 이란고원과 카프카즈를 정복하고 1395년 카스피해 근처의 테레크(Terek)강변에서 킵차크 한국의 토크타미쉬칸군을 분쇄하고 사라이와 아스트라칸을 불태웠으며 모스크바까지 진군하였다. 이렇게 서방을 석권한 후 티무르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인도원정을 감행하였다. 1398년의 인도원정은 풍부한 인도의 물자와 교역타개가 목적이었다. 펀잡과 갠지스강 상류지역은 간단하게 티무르에게 유린되어 투굴룩 왕조의 수도 델리는 철저하게 약탈당하였다.
이어서 다음해 1399년 그루지아를 정복하고 잘라이르 왕가로부터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뺏고 시리아에 진격하여 알레포, 다마스커스를 급습하여 맘룩 왕조를 굴복시켰다. 이때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바야지드 1세는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와 결탁하여 아마드를 도와서 서경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시리아에서 아나토리아로 진군시켜,1402년 7월, 티무르는 강적 오스만투르크의 바야지드1세와 앙카라에서 회전하였다.  바야지드술탄은 12만명의 군대를 동원했고 티무르는 코끼리병을 포함한 20만명을 동원했다. 오스만터키의 술탄 바야지드 1세는 대단한 군주였는데 1396년 니콜폴리스전투에서 유럽의 작은 약소국인 세르비아의 기사단을 용병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군대와 함께 프랑스, 스페인, 왈라키아, 독일,헝가리의 연합기사단을 격파했다.하지만 티무르의 군단은 유럽의 기사단이 깰수 없는 막강한 군대였다.
바예지드 1세는 세르비아기사단에게 정면돌파를 명했다. 앙고라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기사단은 티무르의 중무장기병대와  경무장기병대에게 가볍게 격파당하고 전원 전사했다. 화가난 바예지드1세는 다수의 궁병과 궁기병을 모아 화살을 퍼부었고 티무르 역시 자신의 궁병들에게 대량의 화살을 퍼붓게 하였다. 오스만 터기군대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하면 연전연승하는 무시무시한 정예부대가 있었다. 최고의 정예부대는   예니체리부대와 시파히도기병대였다. 양군은 화살로 다수를 살육한 다음 화살을 다 소모하자 백병전을 벌였고 이 전투에서 키무르군의 코끼리병대가 중무장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오스만군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오스만군의 예니체리와 시파히도기병대도 티무르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티무르와 바예지드도 말을 타고 직접 칼을 들어 적의 목을 쳤으나 결국 싸움은 코끼리를 앞세운 티무르군이 압도하게 되었고 저녘 무렵 바예지드가 자랑하던 예니체리와 시파히도기병대도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바예지드는 포로가 되었으며 티무르는 그 여세를 몰아 에게해까지 진출하였다. 전후사절 요하네스를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하였는데, 카스틸라로부터 클라비호가 사신으로 왔다. 이리하여 서는 소아시아, 시리아로부터 동은 천산산맥, 델리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 티무르의 직접, 간접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대 제국이 성립되었다.
1335년 일칸국의 붕괴후 군소정권이 난립한 이란을 티무르는 탈환한 것이었다. 본래 이란땅은 차가타이가의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원정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침해하는 존재(오스만투르크, 맘룩조, 킵착칸국등)에 대한 공격은 당연하였다. 결국 티무르의 성공은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착민의 경제력이 잘 맞아 들어갈 때 강력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조화가 깨질 때 내륙국가는 망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샤르흐 시대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함으로써 서쪽의 걱정이 사라진 티무르는 몽골제국의 원수이며 이슬람교의 적인 명제국으로의 대원정을 기도하였다. 이 원정이 성공한다면 그는 몽골제국 칭기스칸의 유업을 계승하게 되는 것이었다. 티무르는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마르칸드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은 큰눈이 쌓이고 심한 찬바람이 불었다. 1405년 1월에 결빙한 시르다라아강을 건너 오트랄에 이르른 70세의 티무르는 추위를 녹일 술을 너무마셔 책상에 앉은채 2월 18일 쓰러졌다. 즉시 중국원정은 중단되고 티무르의 유해는 사마르칸드의 구르이미르묘에 매장되었다.
티무르가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시도한 1405년경 티무르는 당시 세계 최강이라는  오스만 터키군대를 격파해서 사기가 등등했고 명나라는 한창 잘 나가는 영락제 주체가 통치하고 있었다. 영락제는 5차에 걸쳐 몽골제국을 공격했으나 2차례만 승리했고 나머지 싸움에서는 아다이칸에게 모두 패배했다.  그는 몽골초원에서 병이들어 죽었다. 티무르와 영락제가 싸웠다면 누가 승리했을까를 예측하기는 어려우나 티무르가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티무르는 10만의 기병대와 보병으로 인도의 투글루크왕조의 군대, 이란을 비롯한 중동의 모든 군대, 이집트의 포악한 군대 마멜루크군단과 러시아지역의 캅차크칸국의 군단을 물리친 군대이다. 그의 군대는 징기스칸군대의 전투력에 맞먹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패배를 몰랐다. 그의 죽음으로 명나라는 지옥의 나락에서 구제되었다.
권력의 핵이 빠진 티무르 제국에서는 자연 정권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그의 손자 칼릴샤가 뒤를 이었는데, 칼릴샤는 폭정을 펴 1409년에 폐위되었다. 이후 혼란에 빠졌으나 1409년에 티무르의 4남 샤르흐가 사마르칸드를 점령함으로서 내란이 겨우 진정되었다. 샤르흐 자신은 헤라트(아프가니스탄)에 살면서 사마르칸드에는 아들인 울룩-벡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는 학문, 예술의 보호자여서 사마르칸드나 헤라트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화려한 궁정문화가 발전하였다. 이들 여러 도시에서는 장려한 모스크, 마드라싸, 공동 숙박시설, 공동 목욕탕, 궁정에 딸린 정원이 만들어져 방문객을 놀라게 하였다. 샤르흐는 동아시아의 중국과 서아시아의 오스만투르크와 오랫동안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실크로드를 둘러싼 동서교역은 더욱 번창하였다. 내륙아시아가 하나의 강대한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15세기는 몽골제국의 전성기와 같은 동서교통이 이루어졌다. 그의 38년간의 치세는 티무르왕조의 전성시대를 이우었으며, 일한국을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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